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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1126
한자 柳淸臣
이칭/별칭 유비(柳庇),영밀(英密)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문철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298년 - 유청신 광정 부사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308년 - 유청신 찬성사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329년 - 유청신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고흥
대표 관직|경력 찬성사|감찰대부

[정의]

고려 후기 천안 광덕사에 호도를 전래했다고 전하는 문신.

[가계]

본관은 고흥(高興), 본래 이름은 유비(柳庇), 시호 영밀(英密)이다. 공민왕 때 좌정승을 지낸 유탁(柳濯)의 할아버지이다.

[활동 사항]

유청신(柳淸臣)[1257~1329]은 장흥부(長興府) 고이 부곡(高伊部曲) 출신으로, 선대도 모두 다 부곡 아전이었다. 당시 부곡 아전은 비록 공로가 있어도 5품을 넘지 못하였는데, 유청신은 어려서부터 담대하였으며 몽고어를 습득해서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응대를 능숙하게 하였다. 충렬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아서 낭장이 되었는데 그때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유청신조인규(趙仁規)를 따라서 진력하여 공을 세웠다. 비록 그 가세(家世)로 봐서는 5품으로 제한하여야 할 것이나 그 본인에게는 3품까지 허가한다.”라고 했으며, 또한 고이 부곡을 고흥현(高興縣)으로 승격시켰다.

그 후 조인규의 추천으로 장군이 되었는데, 원나라 세조(世祖)의 막내 동생인 내안왕(乃顔王)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충렬왕이 출병(出兵)하여 토벌에 협조하라는 명을 내려 원나라로 파송되었다. 유청신이 돌아와서 “적은 이미 평정되어 황제도 연경(燕京)으로 돌아갔으니 출병을 중지하고 왕은 역마로 입조하여 경절(慶節)을 축하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라고 전하자 충렬왕유청신에게 대장군 벼슬을 내리고 밀직 승지(密直承旨)로 전임하였다가 곧 동지밀직 감찰대부로 승진시켰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한 뒤 광정 부사(光政副使) 및 여러 관직을 거쳐 판밀직사사가 되었으며,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자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유청신을 첨의 정승(僉議政丞)으로 삼고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하였으며, 옥대(玉帶)를 상으로 주었다.

1321년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로 갔을 때 왕위를 노리는 심왕 고(瀋王暠)에게 가담하여 충선왕을 모함하려 하였고, 본국에 정동성(征東省)을 설치할 것을 원나라에 건의하는 등 반역 행위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9년간 원나라에 머물다가 죽었다. 이처럼 말년의 심왕 옹립 운동(瀋王擁立運動)과 입성 책동(立省策動) 때문에 『고려사』의 간신전(姦臣傳)에 수록되었다.

[묘소]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마을 입구의 도로에서 약 10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최근 후손들이 세워 놓은 신도비 뒤쪽에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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