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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897
한자 金東淵
이칭/별칭 백우(伯雨)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24년연표보기 - 김동연 출생
몰년 시기/일시 1786년연표보기 - 김동연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언양(彦陽)

[정의]

천안 출신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청렴결백하여 목천현지인 『대록지』에 이름이 전하며, 효자 정려를 받은 동몽교관 김의연(金義淵)의 형이다.

[가계]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백우(伯雨)이다. 아버지는 김여석(金汝錫)이지만, 김양묵(金陽默)에게 입양되었다. 처는 함평(咸平) 이씨이다. 육진의 명장 절제사 김응상(金應祥)의 6대 손이다.

[활동 사항]

김동연(金東淵)[1724~1786]은 천안 목천군 읍내면 농소[지금의 목천읍 덕전리 1구 용소말로 추정]에서 1724년(경종 4) 3월 11일에 태어나 와룡 마을에서 자랐다. 1768년(영조 44) 9월 26일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김동연의 할아버지 김치진이 1709년 12월에 직산군 천흥에서 농소로 이사와서 후학을 길렀다. 뜰에 닥나무를 심어서 종이를 만들어서 『통감』, 『논어』, 『맹자』를 써서 후손이 보게 하였으며, 사랑방을 글로 도배를 하여 후손들이 항시 공부를 하게 하였다. 김동연이 이것으로 공부를 하여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한다.

김동연은 승문원 주서를 시작으로 국가의 공적 사항을 기록하였던 전임 사관을 역임하였다. 1772년(영조 48) 정언 역임 시, “승학(陞學)[성균관 유생들의 학업 진도]을 설행하지 않았으니, 대사성 및 사학의 교수를 파직하는 법을 시행하소서.”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김동연은 노론 벽파의 미움을 사게 되어, 관작을 삭탈당하고 절도에 충군(充軍) 되었다.

1774년(영조 50)에 다시 사헌부 장령으로 기용되어 사간과 집의를 지냈다. 1775년(영조 51) 11월 21일에 사간원 헌납에 제수되었다. 헌납 역임 시 화폐의 주조는 도둑을 키우는 일이라고 폐단의 일단을 논했다. 또한 천견에 대해 수성의 방법으로 언로의 개방과 인재의 등용을 요청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김동연의 현실 인식이 상당히 정확함을 살필 수 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시파(時派)의 선봉장이 되어 벽파의 탄핵에 앞장섰다. 외직으로 개성 부윤, 어모장군, 홍주 목사를 지냈다. 북청 부사로 함경도에 부임 후 병을 얻어 벼슬에서 물러났다. 1786년(정조 10) 9월 22일 향저에서 62세로 졸했다.

[묘소]

묘소는 목천읍 석천리 먹뱅이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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