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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891
한자 李裕興
이칭/별칭 사중(思中),성암(誠菴),성재(誠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9년연표보기 - 이유흥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23년연표보기 - 이유흥 사망
묘소|단소 이유흥 묘소 -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백자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덕성 서원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성격 학자
성별
본관 경주(慶州)

[정의]

개항기 천안 출신의 유학자.

[개설]

이유흥(李裕興)[1859~1923년]은 근대 개항기에 활동하였던 유학자이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다른 집들은 모두 약탈을 당하거나 위협을 받았지만, 이유흥의 집은 참된 학자의 집이라고 하여 침탈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이유흥은 나라의 변란을 미리 예견하고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알려 주기도 하였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중(思中), 호는 성암(誠菴), 별호는 성재(誠齋)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 무오사화 때 영변으로 유배를 갔던 이후(李厚)의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이경로(李敬老), 증조할아버지는 이화진(李華鎭), 할아버지는 이철규(李喆奎)이다. 아버지는 이계렬(李啓烈)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다. 부인은 곽상기(郭相夔)의 딸이다.

[활동 사항]

1859년(철종 10) 3월 26일에 천안 수신면(修身面) 백자리(百子里) 증자동(曾子洞)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13세에 부친의 상을 당했을 때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 24세에 전의 천서리(川西里)에 있던 외사촌인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을 찾아갔다가 3년 후에 정식으로 사생 관계를 맺었다.

33세이던 1891년 9월에 청주 진목리(眞木里)의 서숙에서 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지행(知行)의 사이 정신의 긴요처”를 묻는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질문에 이유흥이 “성(誠) 자상에 있다”고 대답하자 간재는 칭찬하며 「성암기(誠菴記)」를 지어 주었는데 이것이 이유흥의 호가 되었다. 평생을 유학자로 근실하게 학문 연구에 몰두하다가 1923년 2월 29일 6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준영에게 입문했다가 전우를 통하여 학문의 대강을 이루었다. 『간재집(艮齋集)』에는 전우이유흥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가 실려 있다. 1937년에 전우의 문인이던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이 서문과 묘갈명을 짓고 맏아들인 이철영(李哲榮)이 편찬한 『성암 유고(誠菴遺稿)』 7권이 편찬되었다. 1999년 강인환(姜麟煥)이 발문을 짓고 편찬한 『성암 연표(誠菴年表)』 1권도 전한다.

[묘소]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백자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덕성 서원(德星書院)에 배향되었다. 덕성 서원은 1885년(고종 22)에 전국 유림의 발의로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숭덕사(崇德祠)로 창건되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때 훼손된 것을 1978년에 복원했다. 이때 전우·김준영·이재구(李載九)·조홍순(趙弘淳)·임헌찬(任憲瓚) 등과 함께 추배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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