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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858
한자 金麟福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통 인물|아전
성별
대표 관직|경력 군자감 봉사

[정의]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직산현의 아전.

[개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함에 천안을 비롯한 주변 지역도 피해를 면할 수 없었다. 특히 천안은 국토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요지로 관군과 의병이 빈번히 왕래한 곳이라 군량의 조달과 통신의 편의가 요구되는 곳이었다. 또한 정유재란 때는 직산현과 평택 사이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으니 소사 전투가 그것이다. 이는 육전에서 3대 전첩으로 꼽히는 큰 승첩이었다. 당시 직산현의 아전이었던 김인복(金麟福)[?~?]은 전란에 잘 대처하여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전쟁 당시 수령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파직된 사례가 많았으나, 직산 현감만은 큰 공적을 쌓고 승진할 수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김인복의 도움 때문이었다.

[가계]

김인복직산현에서 여러 대에 걸쳐 아전으로 복무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생몰년 및 정확한 가계는 전하지 않는다.

[활동 사항]

1592년 왜군을 피해 선조가 의주로 파천한 후 충청도 관찰사 허욱이 의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지만 왜군에게 길이 막혀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선뜻 나서는 사람도 없었고, 다들 두려워할 뿐이었다. 이때 동료 조계남김인복에게 “나라를 향한 성의는 어찌 현우와 귀천의 차이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그대의 충성심과 용기로 보아 장계를 의주 행재소에 전달하고도 남을 능력이 있으니 이번에 의주에 다녀옴이 좋겠다.”라고 권하였다.

조계남의 간곡한 부탁에 김인복은 흔쾌히 의주행을 자원하였다. 관찰사 허욱은 기쁜 마음으로 장계를 써 주었다. 처음에는 육로를 통해 의주로 가려고 했으나, 곳곳에 왜군이 흩어져 있어 해로를 택해 경양포에서 작은 배를 타고 출발하여 강화를 거쳐 의주에 도달하였다. 의주에 도착해 장계와 함께 도중에 마련한 말과 식량까지 헌납했다.

선조는 친히 인견하고 칭찬의 말과 함께 호남과 호서의 소식과 민정을 두루 물었고, 김인복은 호남과 호서의 상황과 도중에 겪은 일들을 소상히 보고했다. 이에 선조는 향역을 면해 주고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제수하였다. 중인의 신분에서 양반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김인복은 새로운 직책을 받아 향리에 돌아오지 못하고 의주에 머무르다가 왜군이 철수한 뒤에야 직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597년(선조 27)에 향리로 돌아오자 곧이어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정유재란 당시 직산현소사들에서 소사 전투가 벌어졌고 직산현을 비롯한 인근 마을에서 군량미를 조달해야 했는데, 김인복의 덕행과 인품에 의해 군량미의 조달은 문제될 게 없었다.

또한 김인복은 전쟁으로 직산의 공문서가 모두 소실될 위기에 처하자 직접 나서서 흩어진 문서를 모으고 불탄 것은 기록으로 남겼다. 비록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향역도 면하고 품계도 얻었지만, 고향 직산을 위해 헌신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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