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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856
한자 金應祥
이칭/별칭 서백(瑞伯)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조항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몰년 시기/일시 1583년연표보기 - 김응상 사망
성격 무신
성별
본관 언양
대표 관직|경력 병마절도사

[정의]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무신.

[개설]

김응상(金應祥)[?~1583]은 조선 선조 때의 무관으로, 1578년(선조 11)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에 간 주청사(奏請使) 황림(黃琳)의 종사관이 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그 뒤 왕으로부터 비변사에 ‘인재 천거령’이 내렸을 때 곽흘(郭屹)에 의해 추천되었으며, 뒷날 병마절도사에 올라 함경도 지방을 노략질하던 여진족의 침략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좌부승지에 추증되었다.

[가계]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서백(瑞伯)이다. 평장사(平章事) 김취려(金就礪)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감 김덕윤(金德潤)이다. 부인은 조덕영(趙德齡)의 딸 풍양 조씨(豊壤趙氏)이며, 큰아들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김정립(金挺立)이다. 사산 감역관(四山監役官)을 지낸 김절(金晢)이 손자이다.

[활동 사항]

고려의 명장 김취려(金就礪) 장군의 후손으로, 대대로 구직산(舊稷山) 이남면(二南面) 천흥리(天興里)에서 거주하였다. 어려서부터 문무에 뛰어나 활쏘기를 잘했으며 말타기 또한 즐겼는데, 그 솜씨가 날로 발전해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귀여움을 받았다.

김응상황림(黃琳)을 따라 명나라로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해, 그 공으로 오위사 정(五衛司正)에 제수되고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1583년(선조 16)에 여진족이 두만강 일대를 침범하자 선조가 신하들에게 오랑캐를 막을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는데 이때 곽흘(郭屹)은 김응상·이추(李錘)·유극량(劉克良)·이즙(李湒)을 천거하였고, 남치근(南致勤)은 김응상이순신(李舜臣)을 추천하였다. 이에 선조는 패검(佩劍)을 하사하며 김응상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하여 북방으로 파견하였다.

육진(六鎭)에 도착한 김응상은 여러 번 승리하여 적을 거의 소탕하기에 이르렀는데, 진영에 머물러 있던 어느 날 적의 기병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김응상은 용맹하게 싸웠으나 몸에 여러 대의 화살을 맞았고, 며칠 후 상처가 악화되어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선조김응상의 죽음을 매우 애통해하며 좌승지(左承旨)를 증작(贈爵)하고, 아들 김정립에게 초상을 치르도록 명하고 이후 벼슬을 제수하였다.

[묘소]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천흥리 성거산 아래 물왕골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조정의 『순절록(殉節錄)』에 고경명(高敬命), 이순신(李舜臣) 등 21인과 함께 이름이 기록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3.20 인명 오탈자 수정 김철(金哲) -> 김절(金晢)
이용자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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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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