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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787
한자 李寅命
이칭/별칭 기영(祈永),효헌(孝獻)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19년연표보기 - 이인명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58년 - 이인명 정시 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67년 - 이인명 이조 참판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79년 - 이인명 형조 판서·한성부 판윤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80년 - 이인명 대사헌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82년 - 이인명 공조 판서·대사헌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84년 6월 - 이인명 만경형으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884년 8월 - 이인명 해배
활동 시기/일시 1887년 - 이인명 판의금부사에 제수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전주(全州)
대표 관직 대사헌|판의금부사

[정의]

조선 후기 천안에 우거했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기영(祈永)이다. 용궁 현감(龍宮縣監)을 지낸 이일연(李一淵)의 아들로, 판서 이목연(李穆淵)에게 입양되었다. 아들은 이교하(李敎夏)이경하(李敬夏)이다. 양아버지 이목연(李穆淵)[1785~1854]은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 대군(廣平大君)의 후예로 조상대부터 대대로 서울과 광주 지역에서 살다가 목천이 십승지지(十勝之地)로 꼽히는 살기 좋은 고장이며 학문을 숭상하는 고장이라고 여겨 목천으로 내려왔다. 이에 이인명 역시 천안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활동 사항]

이인명(李寅命)[1819~?]은 1858년(철종 9)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왕명 출납 기관인 승정원의 주서에 제수되어 국가의 공식 기록을 담당하는 겸사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861년 도당록에 올랐으며, 이듬해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한 농민의 봉기가 전국적으로 발생하자, 지방관의 불법 행위를 규찰하고 민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경상우도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때 이인명은 전 함양 군수 오경선(吳敬善) 등 6명의 비리를 고발하였다. 1863년에는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67년(고종 4) 1월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4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1870년 홍문관 부제학·이조 참판을 거쳐 1871년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1875년에는 정사 남정순(南廷順)과 함께 동지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8년 『선원보략(璿源譜略)』 수정 시에 『국조어첩(國朝御牒)』 ‘서사관(書寫官)’의 임무를 수행하고 가자(加資)[관원들의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을 때 품계를 올려줌]되었다.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어 대군(大君)의 상에 곡을 하지 않은 강로(姜㳣)한계원(韓啓源)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어 사간원과 연명하여 유배를 보내도록 요청하였다.

1879년 형조 판서·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1880년과 1881년에 대사헌에 재기용되었으며, 1882년에도 공조 판서를 역임한 뒤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같은 해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 황후가 지방으로 도피하고 대원군명성 황후의 장례를 거행할 때 산릉도감의 제조로 활동하였으며, 『선원보략』 수정 시 감인당상(監印堂上)으로 활동하고 가자되었다.

1884년 예조 판서로 있을 때, 고종의 명으로 복제를 개혁하여 소매의 폭을 줄인 착수의(窄袖衣)를 입으라는 절목이 마련되자 전래의 풍속에 위배된다며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6월에 만경현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두 달 만인 8월에 방면되어 11월에 의정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에 올랐다.

1885년 세자가 병을 얻자 의약청 제조로 활약한 뒤 가자되었고,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다. 1886년 형조와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1887년 재차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상훈과 추모]

1910년(순종 3) 효헌(孝獻)이란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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