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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551
한자 笠場衡平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24년 7월연표보기 - 평민 학생들의 동맹 휴학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4년 7월 - 입장 형평 운동 개시
종결 시기/일시 1928년 2월 16일 - 입장 형평사 임시 총회에서 입장 형평 운동 일시적 중단 결의
성격 차별 철폐 및 계급 해방 운동
관련 인물/단체 형평사|장지필|조귀용|이이규

[정의]

일제 강점기 때 천안 지역에 있던 입장 보통학교에서 발생한 형평 운동.

[개설]

형평사(衡平社)는 1923년부터 백정(白丁)들을 주축으로 하여 천민들의 계급 해방을 위하여 결성된 운동 조직이다. 백정에 대한 평민의 차별 대우 때문에 분쟁이 계속 발생하였는데, 그때마다 형평사는 사원들의 단결된 힘과 조직으로 맞서서 투쟁하였다. 천안 지역에서는 사립 입장 보통학교에서 발생한 부당한 차별 대우에 저항하여 형평 운동이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형평 운동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으로, 계급적인 해방 투쟁과 민족적인 해방 투쟁의 두 가지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백정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계급적인 차별이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백정들의 신분에 대한 불만은 형평사 조직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에 대한 교육 차별에 분개하여 회원 80여 명과 더불어 창립총회를 열고 형평사를 설립하였다. 형평사 창립 후 형평 운동은 당시 진보적인 사회 운동 단체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불과 1년 사이에 각 도에 형평사의 지사·분사가 설립될 정도로 본격화되었다.

[경과]

1924년 7월 천안 입장면에서 사립 보통학교의 일반 평민 자녀들이 백정의 자녀들과 함께 수업을 받지 않겠다는 이유로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이에 학교 측에서는 여전히 백정 자녀에 대하여 차별적인 언행을 보였고, 이에 항의한 형평사 회원 자녀들이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학교 측의 차별적인 조치가 문제가 되어, 경성[현재의 서울특별시]의 장지필(張志弼) 등을 위시한 각지 지사·분사의 간부 70여 명이 현지로 모여 큰 규모의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운동이 격렬해지자 입장 주재소에서는 천안 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천안 경찰서장은 시위 현장에 도착하여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시위대는 학교 측의 사과와 함께 형평사 회원 자녀에 대한 차별 없는 교육 환경을 요구하였다.

사립 입장 보통학교와 형평사 회원 간의 갈등은 격화되었고, 교사들은 일제히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결국 학교 측은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학교를 휴교하기로 결정하였다. 학계(學契)의 계원들과 학부형들은 7월 19일 회의를 열어 형평사 회원의 자녀들 중 난폭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한 학생에 한하여 통학을 허용하겠다는 내용을 결의하였다. 또한 학교 측에서는 형평사 회원에 불리한 여론을 조장해 나갔다.

형평사 측에서는 경성 형평사 간부 조귀용(趙貴龍)과 이이규(李利圭)를 파견하여 천안 경찰서에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요구하였다.

[결과]

1924년 7월 사립 입장 보통학교의 학생 차별로 촉발된 입장 형평 운동은 1928년까지 지속되었다. 입장 형평사는 1928년 2월 16일 임시 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사립 입장 보통학교 문제가 토의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임시 총회에서는 사립 입장 보통학교에서 벌어진 차별 대우 문제에 대하여 투쟁을 전개해야 할 것이지만 보통학교가 사립에서 공립으로 전환되는 것에 지장을 줄 수 있음을 우려하여 당분간 투쟁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의의와 평가]

사립 입장 보통학교의 신분 차별 문제는 입장 형평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입장 지역뿐 아니라 전국에서 활성화된 형평 운동은 각종 파업이나 소작 쟁의 등에 참여하는 등 다른 사회 운동 단체와 더불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결과 형평사의 조직은 다른 사회 운동 단체와의 제휴 아래 확장되어 갔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다른 사회 운동 단체와 같이 해체되고 말았다. 형평 운동은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인 동시에 일제 강점기의 식민 통치하에 다른 사회 운동 단체와 제휴하면서 민족 해방 운동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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