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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 역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516
한자 成歡驛站
이칭/별칭 성환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홍제연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성환읍에 위치한 전통 시대의 역.

[개설]

성환역은 서울에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내려가는 중간 기착지로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역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고, 조선 시대에는 충청도에 있는 6개의 도찰방역 중 하나로 여러 개의 속역을 관리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역참제도는 육로교통의 필수 요건이었다. 요로의 교통이 편리한 곳에 역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 보아 그 연원이 깊을 것이지만, 확인되는 것으로는 『고려사』의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성환역은 전통 시대에 삼남 대로로 알려진 해남 대로와 영남 대로의 분기점에 위치해 있었다. 그 중요성으로 인하여 충청도 6개 찰방역 중 하나로 본역인 성환역과 속역을 관할하였다. 성환찰방도의 관할 구역은 성환-천안-공주-여산으로 이어지는 역로와 공주-연기, 공주-예산, 공주-온양, 천안-목천 등을 잇는 역로이다. 조선 후기의 기록에는 성환도역에 속한 12개 속역 중 중역(中驛)이 7개, 소역(小驛)이 5개였다. 또한 성환역 주변에는 역의 기능을 보완하고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원(院)이 여러 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홍경원(弘慶院), 통수원(通水院), 수헐원(愁歇院), 말원(末院), 신원(新院) 등이 그것이다.

[관련 기록]

충청도의 찰방도 중 하나로 규모가 큰 역참이었으므로 관련 기록이 다수 전한다.

『고려사』에 직산 지역의 역으로 서술되어 있고, 『동문선(東文選)』의 「봉선홍경사기」에 홍경사직산현성환역 북쪽에 위치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 현종 이전에 성환역이 이미 있었음이 확인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찰방역인 성환역이 4개의 역을 관할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1462년(세조 8) 역원 편제가 이루어지면서 성환·신은·김제·장명·연춘·일신·광정·경천·평천·금사·단평·유구 등 12개의 역참을 관할하게 하여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각종 지리지와 읍지에는 직산현의 역원으로 기록되는데, 그 위치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세종실록지리지』 : 현 서쪽 경양산

• 『신증동국여지승람』 : 현 북쪽 8리

• 『여지도서』 : 현 서쪽 8리

• 『충청도 읍지』 : 현 북쪽 10리

• 『대동지지』 : 현 북쪽 8리

• 『대동여지지』 : 현서북쪽 8리

• 『호서 읍지』[1871년] : 현 북쪽 10리

• 『호서 읍지』[1895년] : 현 북쪽 10리

• 「성환역지」[『호서 읍지』[1871년]] : 삼서면 월봉산 아래, 본현 10리 거리, 남쪽으로 감영까지 130리

또한 조선 후기의 직산현 고지도에도 성환역은 모두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1871년 편찬된 『호서 읍지』에는 「성환역지」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 후기 성환역의 건물 현황과 배치된 관리, 경제적 상황 등이 매우 상세하다. 최근 천안 박물관에서는 이와 같은 기록을 토대로 성환역의 복원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도 성환역의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이 확인된다. 개인 문집 중에서는 장유(張維)의 『계곡집(谿谷集)』, 이덕무(李德懋)의 『아정유고(雅亭 遺稿)』, 정총(鄭摠)의 『복재집(復齋集)』, 김종직(金宗直)의 『점필재집(佔畢齋集)』, 양희지(楊熙止)의 『대봉집(大峯集)』 등에서 옛 사람의 기문과 시 등을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춘향전』에서는 한양으로 간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향하는 대목에서 서울~성환까지의 노정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내용]

성환도찰방은 1462년(세조 8)에 12개의 역참을 관리하는 것으로 정해진 후 조선 후기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 후기의 기록인 「성환역지」에 의하면 성환역에는 성환도찰방이 업무를 보는 동헌과 아전들의 공간인 작청, 장교들이 머무르는 작청이 있었고, 외삼문을 겸한 척수루(滌愁樓)가 있었다. 척수루의 아래쪽에는 연지(蓮池)가 있었으며 시장도 열렸다. 「성환역지」에 성환역 건물의 구성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관리는 총 137명이 배치되었고, 매년 소요되는 경비는 쌀이 36석, 공이 9석 9도 등이었다. 성환역에 딸린 복호(復戶)와 마위전답(馬位田畓)이 있었으며, 역에 소속된 사창(社倉)이 운영되었다.

[변천]

성환역의 위치는 직산현 삼서면(三西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후 천안군에 병합되었으며, 이 지역을 성환면(成歡面)으로 칭하게 되었다. 1973년 성환읍으로 승격되었다. 성환읍을 대표하는 지명이지만 성환역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못하였는데, 기록상으로는 월봉산 아래로 보이며, 한동안 동성 중학교 일대 혹은 성환읍사무소 부근 등으로 추정되었다. 현대에 월봉산이 개발됨에 따라 성환역의 위치를 고증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는데, 충남 향토 연구회와 천안시 역사 문화 연구실 등에서 성환역 터를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끝에 성환읍사무소 부근을 성환역 터로 추정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성환역은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까지 운영되었던 교통 시설이다. 충청도의 6개 찰방역 중 하나로서 주변의 중역과 소역을 관할하는 주요 국가 시설이었다. 성환역과 관련된 기록이 풍부하고 특히 「성환역지」가 전해지고 있어 조선 후기의 역원 운영과 마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알 수 있는 유적이다. 또한 성환역이 존재함으로서 오늘날의 ‘성환읍’의 지명이 비롯되었으므로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매우 상징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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