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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산 전투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512
한자 稷山戰鬪
이칭/별칭 직산 전투,소사벌 싸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7년 9월 6일연표보기 - 직산 전투 발발
종결 시기/일시 1597년 9월 7일 - 직산 전투 종결

[정의]

조선 후기 정유재란 중 천안 지역의 직산 소사벌에서 벌어진 명군과 일본군과의 전투.

[개설]

정유재란이 시작되자 명은 조선의 급보를 받고 양호(陽鎬)를 경리 조선 군무(經理朝鮮軍務),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삼아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때 북상하던 일본군은 전주를 점령하고 계속 공주(公州)·전의(全義)·진천(鎭川)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일본 흑전장정 부대가 직산(稷山)에 이르렀을때 양호는 급히 부총병(副總兵) 해생(解生) 등을 직산으로 보내 소사(素沙)에서 일대 격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써 일본군의 북상 계획은 크게 좌절되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이후 명과 일본군 사이에 화의를 위하여 2~3년 간 사신이 왕래하였으나, 1597년 화의가 결렬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 명령을 내려 1597년 정월 15일에 다시 침략하였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14만 1500여 명의 일본군은 경상도 일대를 점거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였고 명나라 군도 병부 상서 형개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재차 원병을 보내어 각지에 주둔하였다. 조선은 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지휘로 8도에서 군사를 모으고 대비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주요 장수가 전사하고 일본군이 총공세를 벌이며 남원과 전주가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이 한성 방향으로 북상하자 명나라 군대가 급파되면서 직산 소사평에서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경과]

1597년(선조 30) 8월 14일 남원을 함락시킨 일본군의 좌군 주력과 전주에 주둔하던 우군 주력이 연합하여 경상, 전라, 충청 3도를 유린하면서 북상하였다. 이때 명에서 파견된 경리 양호는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선조가 수차례 출격을 간청하자 1597년 9월 3일 한성으로 들어와 제독 마귀 등과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때 일본군은 이미 충청도 전의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양호는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동정군(東征軍) 가운데 강력한 군사 8000명을 뽑아 대오를 짰고, 부총병 해생·참장(參將) 양등산(楊登山)·유격장(遊擊將) 우백영(牛伯英)과 마귀를 비롯한 일기당천(一騎當千)의 맹장 15명에게 지휘를 맡겨 6일 밤에 천안 방면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결과]

1597년 9월 7일 새벽, 동정군은 금오평(金烏坪)에 진출하여 일본군을 좌우로 포위하면서, 중군(中軍)을 한 번에 격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일본군은 천안을 목표로 이동하여 7일 새벽에는 선봉대가 직산 홍경원(洪慶院)을 향하여 진격 중이었다.

이때 동정군의 선두에서 지휘하고 있던 해생은 공격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왜적의 선봉이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어 조선 사람으로 생각하였으나, 왜적의 선봉이 먼저 조총을 쏘자 명나라 병사들이 일제히 대포를 쏘며, 용맹한 기병이 달리고, 창(槍)과 모(矛)가 날아가 일본군의 중군을 좌우와 전후에서 흔들어 놓으니 유혈이 낭자하였다.

화살에 맞거나 곤봉에 맞아 죽은 일본인이 500~600명에 이르렀고 살아남은 자들은 산에 올라가 백기를 들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명나라 정병의 화살과 낭선(狼筅), 장창(長槍), 그리고 당파(鐺鈀)와 대봉(大棒) 등으로 맞아 죽는 자가 많았다. 일본군은 도검(刀劍)과 궁시(弓矢), 조총을 내던진 채로 목천과 청주를 향하여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1597년 9월 9일 직산 전투의 승리 소식이 알려지면서 왕세자는 묘사(廟社)를 받들고 왕비를 모신 다음 서천(西遷)하였다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직산 전투 후에 일본군이 다시 한성 침략을 도모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에서 직산 전투를 제3차 평양성 전투, 행주산성 전투와 함께 조선의 3대 전투라고 할 만큼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이후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 한성에 대한 공략을 포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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