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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510
한자 李麟佐-亂
이칭/별칭 무신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725년 - 소론 세력 결집으로 이인좌의 난 발발
발생|시작 시기/일시 1728년 3월 15일연표보기 - 반란군이 청주성을 함락
종결 시기/일시 1728년 4월 19일 - 반란군을 관군이 소탕
성격 사건

[정의]

조선 후기 영조 즉위 직후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 일부가 연합하고 이인좌가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사건.

[개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 일부 세력은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李麟佐)[?~1728]가 대원수가 되어 반란을 지휘하였고, 반란군은 충청도 청주를 점령하면서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은 청주에서 가까운 목천에 머물며 병사를 모았다. 목천은 남인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으므로 반란에 호응할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반군은 목천을 지나 안성과 죽산에 이르렀지만 이곳에서 관군에게 대파당하고 호남과 영남의 반군 역시 궤멸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다.

[역사적 배경]

경종은 세자 때부터 병약하여 국사 처리에 어려움이 많았고, 숙종은 이를 우려해 이이명(李頤命)과 정유독대(丁酉獨對)[1717년]를 통해 후에 영조(英祖)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을 부탁하였다. 경종 초기에 연잉군이 세제 책봉(世弟冊封)되고 세제 대리청정까지 하게 되자 소론측은 경종 보호의 명분을 들어 신임사화(辛壬士禍)[1721년에 일어나 1722년에 대옥으로 끝났다는 의미에서 임인옥(壬寅獄)이라고도 함]를 일으키고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그러나 경종이 재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즉위하여 임인옥사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됨으로써 소론은 배척당하고 노론의 지위는 회복되었다. 이에 소론에서는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725년(영조 1)부터 소론은 세력을 결집해 나가며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소현 세자의 증손]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전국 각지의 소론계 인물이 이에 호응하며 흉서와 괘서 사건을 일으키고, 가정(家丁)·노비 등의 가속인을 모군(募軍)하고 명화적(明火賊) 등을 군사로 동원하기로 하였다.

[경과]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온건파가 기용되면서 반란 모의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등용된 이들이 반란 세력의 동태를 고변하자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에 호위를 명하였다. 반란은 1728년(영조 4)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하면서 시작되었다.

반군은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성에 들어와 청주의 충청 병영을 급습하여 충청 병사 이봉상과 영장 남연년 등 관리를 살해하고, 자체적으로 목사와 병사를 세운 후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 병마를 모집하였다. 그리고 이인좌를 대원수로 하여 청주를 장악한 다음 주변 고을인 목천과 청안, 진천을 통과해 안성, 죽산으로 진군하였다.

청주 반군이 안성으로 향하면서 가장 먼저 점령한 지역이 목천이었다. 목천 현감 윤취은(尹就殷)은 3월 15일 관문을 닫고 이미 도주한 상태였고 반군은 가짜 목천 현감에 곽장(郭章)을 임명하여, 목천 향소(鄕所)를 중심으로 군사와 군마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내용을 모르고 향소에 모인 군사들이 출발 즈음 사정을 알고 흩어져 도망하였다.

목천은 이황의 제자인 영남의 거유 정구(鄭逑)를 제향한 도동 서원(道東書院)이 소재할 만큼 충청 지역에서는 드물게 남인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다. 도동 서원에 제향된 정구는 말년에 목천 번자울에서 우거하며 목천의 선비들과 죽림 정사(竹林亭舍)를 세워 강학 활동을 하였으며, 남인 김일손(金日孫) 역시 처향인 목천에 거주하고 있었고, 정구의 제자 황종해(黃宗海)는 목천이 가향이었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목천은 남인 계통의 사족들이 활약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반군이 모병 지역으로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안성과 죽산으로 진격한 반군은 관군에게 크게 패하고 이 사이에 청주 역시 상당성(上黨城)에서 궤멸되었다.

[결과]

이인좌의 난에는 청주 주변의 고을 외에도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도 호응하였다. 그러나 경상도의 반군은 충청도 반군과 합류하려다 실패하였고, 전라도의 반군은 주모자가 체포됨으로써 반란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영조는 도성 문을 폐쇄하고 도성 밖 관군을 동원해 서울을 방비하면서, 토벌군을 보내 반군을 소탕하였다. 반란 세력을 평정한 관군이 4월 19일 개선하자 영조는 친히 숭례문루에 나가 영접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인좌의 난을 주동한 이들이 소론이지만, 난을 평정한 것 역시 소론 정권이었기에 이후 소론의 처지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영조의 탕평책은 더욱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천안[목천] 일대는 조선 시대 충청우도에서는 드물게 소론과 남인이 공존하는 지역이었으므로 반란군 측에서 협력을 기대했던 곳이었다. 그렇지만 이 지역 선비들이 호응하지 않았고 이에 이인좌의 반란군이 무너지는 데 일조를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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