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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이·망소이 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481
한자 亡伊-亡所伊亂
이칭/별칭 공주 명학소의 난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문철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176년 1월연표보기 - 망이·망소이 공주 명학소에서 봉기
전개 시기/일시 1176년 - 정부에서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
전개 시기/일시 1176년 - 망이·망소이가 예산, 충주 점령
전개 시기/일시 1177년 1월 - 망이·망소이가 정부에 강화 요청
전개 시기/일시 1177년 2월 - 망이·망소이가 재봉기해 가야사 침략
전개 시기/일시 1177년 3월 - 망이·망소이가 홍경원을 불에 태움
전개 시기/일시 1177년 5월 - 망부에서 충순현을 명학소로 강등하고 군대를 파견해 난민 토벌
종결 시기/일시 1177년 7월연표보기 - 망이·망소이의 체포로 봉기 종결
발생|시작 장소 명학소 - 충청남도 공주시
종결 장소 청주 - 충청북도 청주시
성격 농민 항쟁
관련 인물/단체 망이|망소이

[정의]

고려 후기에 천안을 비롯한 충청도 지역에서 공주 명학소민들이 신분제 타파를 목적으로 일으킨 봉기.

[개설]

망이·망소이 난은 무신집권기인 1176년(명종 6)에 충청남도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 등 농민과 천민들이 신분제의 타파를 목적으로 일으킨 봉기이다.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난의 여파로 1176년 3월에는 충청남도 천안 지역에 있던 홍경원이 불타기도 하였다.

[역사적 배경]

무신집권기에 서북면 지역에서 조위총(趙位寵)[?~1176]이 병사를 일으킨 일로 촉발된 농민 항쟁이 한창일 무렵, 남부 지역에서도 이른바 ‘남적(南賊)’이라고 통칭되는 농민 항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175년(명종 5) 8월에 이미 승선(承宣) 송지인(宋智仁) 등이 남적 석령사(石令史)와 몰래 통하여 정변을 꾀하였다는 거짓 고발에 의해 당사자들이 섬으로 유배된 일이 있었고, 11월에도 문신(文臣)이 남적과 함께 난을 도모한다는 무고(誣告)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유배당한 사실이 있었다. 한반도 남부의 항쟁 중에서 가장 기세를 떨친 것은 1176년(명종 6) 정월에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 난이었다.

[경과와 결과]

1176년(명종 6) 정월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무리를 모아 산행 병마사(山行兵馬使)를 자칭하고 봉기해 공주를 함락시켰다. 당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정부는 우선 지후(祗候) 채원부(蔡元富)와 낭장(郎將) 박강수(朴剛壽)를 보내 선유(宣諭)[임금의 훈유(訓諭)를 백성에게 널리 알림]하였다. 그러나 망이 등이 응하지 않아 실패했다.

이에 대장군 정황재(丁黃載)와 장군 장박인(張博仁) 등에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난을 진압하도록 했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다시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켜 현령(縣令)과 현위(縣尉)를 파견하고, 소민들을 달래는 등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망이·망소이 등은 이에 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산현(禮山縣)을 공략해 감무(監務)를 살해하고 충주(忠州)까지 점령하였다.

정부는 이에 대장군 정세유(鄭世猷)와 이부(李夫)를 남적 처치 병마사(南賊處置兵馬使)로 삼아 대대적인 토벌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주효해 1177년 정월 망이·망소이가 강화를 요청함으로써 봉기가 일단 진정되는 듯하였다. 정부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주모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오히려 곡식을 주어 향리로 호송하였다.

그러나 한 달 뒤에 망이·망소이 등은 재차 봉기해 가야사(伽耶寺)[지금의 충청남도 예산 덕산]를 침략했고, 3월에는 홍경원(弘慶院)[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을 불태우고 개경까지 진격할 것이라 공표했다. 이때 망이·망소이 등이 홍경원의 주지를 시켜서 개경 정부에 전달한 글에 의하면, 이들이 다시 봉기하게 된 이유는 난이 진정된 이후 정부에서 군대를 보내 그들의 가족들을 가두었기 때문이었다.

망이 등은 아주(牙州)[지금의 아산]를 함락시키고, 청주를 제외한 청주목(淸州牧) 관내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였다. 이에 정부는 강경책을 펼쳐, 1177년 5월에 충순현에서 명학소로 다시 강등시키고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망이 등은 큰 타격을 입어 6월에는 망이가 사람을 보내 항복을 청해왔고, 7월에는 망이·망소이 등이 정세유에게 붙잡혀 청주옥(淸州獄)에 갇히게 되었다. 이로써 1년 6개월 동안의 소민들의 봉기는 완전히 진압되었다.

[의의와 평가]

망이·망소이 난은 부곡제 영역에 속한 소민(所民)이 중심이 되었다는 데 큰 특징이 있다. 소(所)의 주민들은 일반 군현민들과 동일한 수취 체계에 놓여 있었지만 집단적으로 특정의 역(役)을 부담함으로써 일반 촌락민들에 비해 과중한 역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소민들의 도망이나 유리(遊離) 현상이 상대적으로 심각하였다.

특히 12세기 이후 생산력의 발전은 금·은·철·염·자기·먹 등의 수요 증대를 가져와 상대적으로 소 지역민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소민들은 일반 촌락민과 똑같이 농경을 주로 하는 농민이었는데, 특정 역에 동원되는 시기는 농한기에 해당하는 혹한기(酷寒期)였다. 명학소민들의 봉기가 정월에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바로 명학소민의 특정 역의 부담에 따른 힘든 상황이 봉기의 원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주변의 향촌 사회에는 수확기를 전후해서부터 국가 및 지주들의 가혹한 부세 수탈이 있고, 농한기에 역역(力役) 동원이 심해져 이에 반발하는 농민층이 많았다. 그래서 난을 일으키는 무리들이 도산하거나 도망하는 부근의 농민층을 규합하여 쉽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서북면 지역과 남부 지역의 농민 항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무신 정권은 6월에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켜 현령(縣令)과 현위(縣尉)를 파견하는 회유책을 시도하였지만, 이미 명학소민만이 아니라 주변의 농민들이 광범위하게 봉기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진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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