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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1502
한자 旌閭
이칭/별칭 정문(旌門)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홍제연

[정의]

충신·효자·열녀 등에 대하여 국가에서 내린 포상으로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

[충·효·열 삼강 인물의 포상과 역사적 의미]

조선 시대에는 충·효·열 삼강 윤리를 중요시 여겨 그 같은 행적을 보인 인물을 찾아 기록하고 포장하는 것을 국가적으로 관장하였다. 포상은 몇 가지 단계가 있는데, 그중 최고의 포상이 바로 정려였다. 정문을 내린다는 의미의 ‘명정’에는 물질적인 포상의 상물(賞物), 관직을 주는 ‘상직(常職)’, 세금을 면제해 주는 ‘복호(復戶)’ 등의 포상이 수반되었다. 명정을 받은 집안은 현판을 만들어 대문 위에 걸기도 하고, 정려각을 만들어 내부에 명정 현판을 걸어두기도 하였다.

정려를 받기 위해서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고을의 유림이 삼강 인물을 현양하여 수령에게 보고하거나 수령이 행적을 보인 인물을 찾아 감영에 보고하고, 감영의 관찰사가 다시 예조에 올려 의정부의 심사를 거친 후 국왕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였다. 이 과정이 때로는 급속히 진행되기도 했지만, 대개는 수년에 걸쳐 각 과정을 통과하였다.

명정은 개인과 가문의 영광인 동시에 경제적인 이익도 따라오는 것이었으므로 삼강 행실을 실천한다고 해서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정려는 사회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지역의 유력 성씨에게 집중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정려 사례와 기록]

조선 시대에 정려가 내려진 기록은 실록과 지리지 등에서 확인된다. 이중 실록에서는 예조에서 왕에게 각 지역의 정려 포상 대상 인물에 대해 보고하는 기록이 다수 확인되는데, 천안 지역의 정려 사례는 다음의 표와 같다.

@@GC4501502_01 [표 1] 역대 『실록』에 기록된 천안시의 충·효·열 정려 사례

지리지에 천안시의 충·효·열 인물이 등재되어 있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부터이다. 천안군의 효자 양호(梁好)직산현 효자 봉유지(奉由智)에게는 정문이 내려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두 사람의 행적을 보면 천안군의 경우 “효자 양호는 고려조의 인물로 젊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부모가 병에 걸렸을 때에 그 대변을 가져다가 달고 쓴 것을 맛보았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는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아버지가 일찍이 막내아들 순(純)이 전장이 없음을 불쌍히 여겼으므로 호(好)가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자기의 몫을 아우에게 주었다. 이 일이 임금에게 들려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직산현의 경우는 “효자 봉유지는 조선조의 인물로, 효행으로 정문을 내렸으며, 벼슬이 지군사(知郡事)에 이르렀다.”라고 되어 있다.

다음은 조선 후기의 지리지인 『여지도서』에 수록된 천안 지역 3개 고을의 충효열 인물이다. 『여지도서』에 수록된 인물 중 포상 내용이 명정, 정려 등으로 기록된 경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GC4501502_02 [표 2] 『여지도서』에 수록된 천안시의 충·효·열 인물

『여지도서』 이후에도 영조~헌종 연간에 『충청도 읍지』가 편찬되었고 이중 「직산현지」에는 충신 열전(忠臣列傳, 附忠奴)·효자 열전(孝子列傳, 附孝婦)·열부 열전(烈婦列傳, 附貞婦)이 설정되어 각 인물의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있다.

1863년에 간행된 『영성지(寧城誌)』는 ‘천안군지’의 별칭으로 천안의 충·효·열 인물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영성지』에는 충신 8인[고려 1, 본조 2, 신증 5], 효자 29인[고려 1, 본조 22(효녀 3 포함), 신증 6], 열녀 9인[본조 3, 신증 6]이 수록되어 있고, 다시 포상을 받지 못한 효열[未蒙褒孝烈秩] 71인이 추가되어 있다.

‘목천현지’인 『대록지(大麓誌)』에는 목천현의 효자[효녀·효부 포함] 67인, 열녀 24인, 충의(忠義) 17인이 기록되어 『영성지』와 함께 천안 지역사 연구의 기초 자료가 된다.

1871년의 『호서읍지』 중 ‘천안읍지’에는 몇 명의 인물이 추가되었고, 일제 강점기인 1934년 이병연(李秉延)이 편집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의 충청남도 천안군 편에는 정려 조가 설정되어 13기의 정려가 소개되어 있다.

[천안시에 현존하는 정려]

1993년에 발간된 『충남 지역의 문화 유적』 제7집 천안시·천안군 편에는 모두 30기의 정려가 조사되어 있다. 이 중 충과 관련된 것이 4기, 효와 관련된 것이 23기, 열과 관련된 것이 10기, 미상 1기이다.

즉, 실록과 읍지를 통해서 확인된 천안시의 정려 사례는 모두 61건이지만 현존하는 것은 20기에 불과하고, 문헌을 통한 정려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다수 존재하고 있다.

@@GC4501502_03 [표 3] 문헌상 확인된 천안시의 정려와 현존 여부

[의의와 평가]

정려는 충·효·열 인물에 대해 국가에서 포상을 하고, 삼강행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를 통해 조선 시대 천안 지역의 주요 사족 가문의 활동상을 살필 수 있기도 하다. 특히 이렇게 단순한 목록뿐만 아니라, 정려 포상 과정에서 생산되는 문서 자료를 찾을 경우 천안 지역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이다.

조선 시대 천안 지역은 천안군, 목천현, 직산현 세 개의 고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세 고을의 정려 포상 기록은 61건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은 20기 정도이며, 현재 확인되는 정려 중에 10여기는 문헌을 통한 정려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다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점은 앞으로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며, 천안 시민들도 관심을 갖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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