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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87
한자 閔哲勳
이칭/별칭 성약(聖若),만향(晩香)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형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6년 9월 9일연표보기 - 민철훈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84년 3월 - 민철훈 별시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89년 - 민철훈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93년 - 민철훈 병조 참의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97년 - 민철훈 비서원 승·장례원 장의·중추원 의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2년 - 민철훈 미국 주재 특명 전권 공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민철훈 기호 흥학회 찬무원·경위 학교 교장 역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6년 9월 - 민철훈 남작 작위 승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민철훈 유도 진흥회 조직
몰년 시기/일시 1925년 7월 1일연표보기 - 민철훈 사망
성격 친일 관료
성별
본관 여흥
대표 관직 궁내부 특진관|특명 전권 공사

[정의]

근대 개항기 천안 출신의 친일 관료.

[개설]

민철훈(閔哲勳)[1856~1925]은 1884년 별시 병과에 급제한 이래 다양한 관직을 경험한 전형적인 관료였다. 1900년부터 시작된 6년간의 외교관 생활은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는 안목을 갖게 하였으며, 문화 계몽 운동에 종사하는 등 문명사회 건설을 위한 노력도 병행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민종묵의 사망 후 남작을 승계 받는 등 대표적인 친일 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약(聖若), 호는 만향(晩香)이다. 아버지는 민종묵(閔種黙)이다. 민종묵이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받은 이래 민철훈·민규현·민태곤(閔泰崑)·민태륜(閔泰崙) 형제로 승계되는 등 조선 귀족 중 유일하게 4대까지 이어졌다.

[활동 사항]

집안에서 전통 학문을 수학한 후 1884년 3월 별시 병과에 24위로 합격하여 관계로 진출하였다. 1887년 6월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승정원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1893년 1월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8월에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1895년 7월 봉상시 사장(奉常寺司長), 이듬해 3월 중추원 3등 의관을 거쳐 1897년 10월 이래 비서원 승(祕書院丞)·장례원 장례(掌禮院掌禮)·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을 역임했다.

1900년 11월 영국·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 주재 특명 전권 공사를 겸임하였다. 1904년 2월에는 미국 주재 특명 전권 공사를 맡았으며, 이듬해 3월 독일 빌헬름 황태자 결혼식 참석 대사로 임명되었다. 통감부 설치 후 귀국하여 1906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의친왕부 총판(總辦)과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했다.

한·일 강제 병합 이후 1914년 6월 아버지 민종묵의 후계로 선정되어 종5위에 서위되면서 일본 천황이 주는 사령서를 받았다. 이듬해 11월에는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 기념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7월 민종묵이 사망하자 9월에는 남작 작위를 승계하고 10월 슴작 사령서를 받았다.

1919년 12월 자본금 300만 원으로 해동 은행(海東銀行)을 설립하고 이듬해 6월 창립총회에서 취체역에 선임되었다. 1919년 12월 백제 상사 주식회사의 창립총회에서 취체역 사장에 선임되는 등 식민 권력의 비호를 받아가면서 경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듬해 2월 경성 주식 현물 취인 시장 조선인 측 발기인 총대, 3월에는 이기용(李琦鎔) 등과 함께 발기인 대표로 자본금 1,000만 원의 농림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21년 조선 운수 합명 회사 사장을 맡았고, 1925년 4월 사단 법인 조선 귀족회 이사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7월 1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1908년 8월 기호 지방 계몽 운동 확산을 위한 기호 흥학회 찬무원에 임명되어 많은 기부금을 냈다. 고향인 천안에서 직산 유지 및 군수 등과 함께 경위 학교(經緯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는 등 근대 교육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1909년 7월부터 주보로 발간되던 『한성 신보(漢城新報)』가 일간으로 바뀌면서 찬성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월에는 김영한(金榮漢) 등과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유림들을 규합하고 조선 총독부의 경제적 보조를 받아 유도 진흥회(儒道振興會)를 조직하는 등 유교 친일화에도 앞장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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