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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85
한자 姜㳣
이칭/별칭 기중(期中),표운(豹雲),정은(貞隱),익헌(翼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09년연표보기 - 강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48년 - 강노 증광시 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50년 - 강노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66년 - 강노 강화도 위유사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71년 - 강노 병조 판서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72년 - 강노 좌의정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73년 - 강노 파직당함
활동 시기/일시 1874년 - 강노 판중추부사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83년 - 강노 경상남도 안의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884년 - 강노 유배에서 풀림
몰년 시기/일시 1887년연표보기 - 강노 사망
유배|이배지 강노 유배지 - 경상남도 함안군 안의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진주
대표 관직 사간원 대사간|병조 판서|좌의정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천안 출신의 문신.

[개설]

강노(姜㳣)[1809~1887)는 흥선 대원군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기중(期中), 호는 표운(豹雲)·정은(貞隱),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현감을 지낸 강이구(姜彛九)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1837년(헌종 3) 진사시를 거쳐 1848년(헌종 14)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50년(철종 1) 정자(正字)가 된 뒤 홍문관 응교를 거쳐, 1850년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강노의 문중은 북인계로 노론 중심의 세도정치 시기에는 중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 집정 후 남인계와 북인계가 많이 기용됨에 따라 강노는 1866년 병인양요로 피폐해진 강화도에 위유사(慰諭使)로 나가게 되었다.

그 뒤 흥선 대원군이 계속 중용하여 1871년 병조 판서를 거쳐 1872년 좌의정이 되었다. 1873년 흥선 대원군을 탄핵한 유생 최익현(崔益鉉)의 처벌을 주장하였다가 고종이 친정하게 되면서 우의정 한계원(韓啓源)과 함께 파직당하였다.

1874년 판중추부사로 재기용되어 관직에 있던 중 1878년 효휘전(孝徽殿)의 참례(參禮)에 참석하지 않은 죄로 잠시 유배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었다. 다음해 일본의 인천항 개항 요구에 반대하였으며, 판중추부사로 있을 때 사임하여 봉조하(奉朝賀)로서 기로소에 들어갔다.

1883년 임오군란 때 난도(亂徒)와 결탁하였다는 혐의로 경상남도 안의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풀려났다. 1887년 사면되었고, 그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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