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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74
한자 黃鳳善
이칭/별칭 순서(舜瑞),상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8년 8월 11일연표보기 - 황봉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황봉선 수원 고등 농림학교 학생 비밀 결사 건아단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황봉선 조선 농우 연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황봉선 일경에 체포
추모 시기/일시 1980년 - 황봉선 대통령 표창 추서
몰년 시기/일시 1982년 1월 27일연표보기 - 황봉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황봉선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황봉선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교천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교육자
성별
대표 경력 충남 대학교 교수

[정의]

일제 강점기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교육자.

[개설]

황봉선(黃鳳善)[1908~1982]의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순서(舜瑞), 호는 상산이며, 본적지는 충청남도 천원군 목천면 교천리 18번지이다. 1926년 여름에 조직된 수원 고등 농림학교의 항일 학생 비밀 결사인 건아단(健兒團)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퇴교를 당하고 1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황봉선은 목천 보통학교와 경복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의료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농촌 계발에 뜻을 두어 수원 고등 농림학교로 전학하였다.

1926년 여름에 조직된 수원 고등 농림학교의 항일 학생 비밀 결사인 건아단(健兒團)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건아단은 학교의 기숙사 내 한국인 학생들의 모임인 ‘조선인 학생 담화회’를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민족 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해 농민 대중을 계발하여 신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학생 비밀 결사였다.

건아단원들은 농촌 사회의 개발이 곧 독립운동의 기초가 된다는 판단 아래,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농민을 계몽·지도하는 데 힘을 쏟았다. 수원군 안룡면(安龍面) 고견리(古牽里)를 비롯한 부근 여러 마을에 농민 야학을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때 단군 연호를 사용한 것이 후일 말썽이 되었다.

1927년 9월에 북도(北道) 지방을 수학여행 할 때, 강원도 등지에서 일본인의 대규모 농장을 본 건아단원들은 그 식민성에 분개하며 민족 농장 건설의 꿈을 키웠다. 그리하여 1928년 6월에 당시 일본 동경에 설치되어 ‘조선인에 의한 조선 농촌 개발’을 표방하고 있던 조선 농우 연맹(朝鮮農友聯盟)에 가입하였다. 그것은 건아단의 이상과도 합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조선 농우 연맹이 국내에서 지방 강연 등 계몽 활동을 할 때 수원고등 농림학교 학생도 연사로 참석하였는데, 일제에 의해 강연 활동이 중지되면서 연사로 참석했던 수원 고농의 한전종(韓典鍾)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이때 건아단의 조직이 발각되지는 않았으나, 단원들은 사태를 중시하고 ‘계림 농흥사(鷄林農興社)’로 명칭을 바꿔 위장하였다.

그런데 건아단 출신으로 김해 공립 농업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김성원(金聲遠)이 건아단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 일 때문에 1928년 여름에 ‘계림 농흥사’는 다시 ‘조선 개척사(朝鮮開拓社)’로 조직을 개편했으나, 사건이 확대됨에 따라 결사의 조직과 활동이 드러나게 되어 1928년 9월에 전 회원이 체포되었다.

황봉선은 체포 후 18개월 동안 복역하면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2월에 경성 지방 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다. 이후 복교하여 수원 고등 농림학교를 졸업한 다음 농촌 계몽에 힘썼으며, 광복 후 천안 농업학교장을 거쳐 충남 대학교로 전임하여 학생과장·도서관장·교무처장·농대 학장 등을 역임한 뒤 1971년 8월 정년을 맞아 퇴임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농업 경제학』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황봉선의 공훈을 기려 1980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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