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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799
한자 李時白
이칭/별칭 돈시(敦時),조암(釣巖),충익(忠翼)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항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1년연표보기 - 이시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이시백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 2등으로 영양군에 책봉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이시백 협수사로 이괄의 난 진압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이시백 병자호란 때 서성장으로 남한산성을 수비
활동 시기/일시 1640년 - 이시백 심양에 볼모를 보내는 문제로 여산에 중도부처
활동 시기/일시 1641년 - 이시백 중도부처에서 풀려나 총융사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5년 - 이시백 영의정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60년연표보기 - 이시백 사망
묘소|단소 이시백 묘소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연안
대표 관직 병조 판서|영의정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에 묘소를 두고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이수장(李壽長), 증조할아버지는 이기(李夔), 할아버지는 이정화(李廷華)이다. 아버지는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우찬성까지 오른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이고, 어머니는 인동 장씨로 증 참판 민(旻)의 딸이다. 동생은 호조 판서를 지낸 이시방(李時昉)이다.

[활동 사항]

이시백(李時白)[1581~1660]은 이항복(李恒福)·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23년 아버지 이귀와 함께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로 군사를 모집하여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안현(鞍峴)에서 반란군을 격퇴했다. 이 공으로 수원 부사가 되었는데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해 몽진(蒙塵)에 나선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했다.

1629년(인조 7)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다는 죄로 품계가 깎였으나, 이듬해 양주 목사를 거쳐 1631년 강화부 유수를 지냈다. 1636년 병조 참판으로 남한산성 수어사·호위대장·특진관을 겸하였는데, 이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서성장(西城將)으로 남한산성을 수비했다. 1638년 병조 판서가 되었고 병자호란 당시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하여 아들 이유(李愉)를 심양(瀋陽)에 볼모로 보내게 되었는데, 서자를 대신 보냈다가 2년 뒤인 1640년에 탄로가 나서 여산(礪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1641년에 다시 총융사로 등용된 뒤 한성부 판윤, 형조·공조 판서를 역임했다.

1645년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죽자 인조봉림 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으려 할 때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1650년(효종 1)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었고,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진 뒤 1655년 영의정이 되었다. 1658년에는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했으며, 1660년(현종 1) 자의 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했다. 이해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시백은 일곱 번이나 판서를 역임하였고 영의정까지 이르렀으나, 청빈하여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다고 한다. 장유(張維), 최명길(崔鳴吉), 조익(趙翼)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묘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이시백의 묘소가 있는데 첫째 부인 부인 남원 윤씨와 둘째 부인 창원 황씨의 묘가 같이 있어 봉분이 셋이다. 연안 이씨 가문의 묘역은 본래 경기도 고양에 있는데, 이시백의 아버지 이귀의 묘를 공주로 이장하면서 후손들이 공주와 천안 광덕, 풍세 일대에 거주하게 되었다. 공주와 천안 등에는 이귀의 사패지가 있었으며, 천안에 이시백의 묘소가 있는 것도 이와 관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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