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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777
한자 尙震
이칭/별칭 기부(起夫),송현(松峴),범허재(泛虛齋),향일당(嚮日堂),성안(成安)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조항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93년연표보기 - 상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19년 - 상진 별시 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33년 - 상진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43년 - 상진 공조 판서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45년 - 상진 병조 판서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48년 - 상진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질병으로 사임
활동 시기/일시 1549년 - 상진 우의정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51년 - 상진 좌의정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58년 - 상진 영의정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564년연표보기 - 상진 사망
묘소|단소 상진 묘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산 152-5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목천(木川)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전기 천안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목천(木川)이다.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범허재(泛虛齋)·향일당(嚮日堂),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찰방(察訪) 상보(尙甫)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연안 김씨(延安金氏)로 박사(博士) 김휘(金徽)의 딸이다.

[활동 사항]

상진(尙震)[1493~1564]은 조실부모하여 큰누이의 집에서 자랐는데, 매부는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이다.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는 공부보다 말 타기와 활쏘기에 전념하여 이웃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학업에 힘써서 성수침(成守琛)[1493~1564] 형제와 교유하였다.

1516년(중종 1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어 151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곧이어 봉교(奉敎)·예조 좌랑을 거쳐 지평에 특진되었다. 1528년 사헌부 장령에 올랐는데, 질병으로 당시 영경전(永慶殿)에서 거행된 세자의 친제(親祭)에 불참하여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그 뒤 장령·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지방관의 탐학을 제거할 것과 농업 진흥책을 제시하였다.

1533년 대사간이 되었고 뒤이어 부제학·좌부승지를 역임하면서 언론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형조 참판을 지내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잘 다스렸다. 1539년 중종의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형조 판서가 되었는데, 전례가 없는 특진이라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한성부 좌윤으로 체직되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한성부 판윤을 연임하고 1543년 공조 판서가 되었다. 이듬해인 1544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 판서가 되어 국방을 총괄하였다. 중종은 특히 상진를 신임하여 우찬성(右贊成)을 제수하였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로 체직되었다. 곧이어 형조 판서가 되었으나 윤원로(尹元老)와 결탁하였다 하여 인종이 즉위하자 경상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자 실권을 장악한 이기 등의 천거와 문정 왕후(文定王后)의 후원으로 병조 판서에 중용되어 군정 확립에 힘썼는데, 특히 마정(馬政)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실시에 노력하였다. 1548년(명종 3)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우찬성이 되었으나, 질병으로 사임하였다. 1549년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의 추천으로 이조 판서가 되었고,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이기·심연원(沈連源) 등과 더불어 국정을 주관하였는데, 문정 왕후가 주장한 양종(兩宗) 설립에 온건론을 펴서 유생들에게 지탄을 받기도 하였고, 부민 고소법(部民告訴法)을 실시하여 민원을 살피기도 하였다.

1551년 좌의정에 올랐고, 1558년 영의정이 되어 5년 동안 국정을 총괄하였다. 재임하는 동안 황해도 평산(平山) 일대를 근거로 소요를 일으킨 임거정(林巨正)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좌의정 이준경(李浚慶)과 더불어 사림을 등용하는 데 힘썼다. 1563년(명종 18)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전임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상진은 청렴하고 인자한 명상(名相)으로서 조야(朝野)의 신망이 두터웠으나, 만년에는 윤원형·이기 등 소윤(小尹) 일파와 어울려 사림들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순회 세자(順懷世子)가 사망하자 연일 음식을 폐하고 곡을 하다가 끝내 심장병에 걸려 1564년 윤2월 23일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얼마나 청렴했는지 15년 동안 정승을 지냈지만 축적한 재물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유언 또한 조촐하여 “내가 죽은 뒤 비석에 이것저것 적을 것 없고 다만 만년에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여 얼큰히 취하면 감군은(感君恩) 곡조를 타는 것으로 스스로 즐겼다고 하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한다.

[묘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산 152-5번지의 상문 고등학교 내에 상진과 부인 전주 이씨의 묘역(墓域)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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