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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622
한자 木川-義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화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충의비 목천 16의사 충의비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화계리 249-1 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이인좌의 난 때 반란군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목천 사족 16명.

[개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반란군이 청주를 장악하고 서울로 향하기 위해 목천현에 머물 때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격파한 뒤 조정으로부터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에 책봉된 16명을 가리켜 ‘목천 16의사’라고 한다.

[활동 사항]

1728년(영조 4) 소론과 남인 일부는 영조와 노론 세력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때 이인좌가 대원수가 되었으므로 역사적으로 ‘이인좌의 난’이라 칭하고 있다. 이인좌의 반란군은 가장 먼저 청주를 장악한 뒤 목천을 거쳐 서울로 향하게 되는데, 당시 목천은 남인계 사족의 세가 강하던 지역이었으므로 반군은 목천 사람들의 협조를 기대하며 목천에서 병력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때 반군 부대의 방어사(防禦使) 안후기(安厚基)는 진천에서 주력 부대와 갈라진 뒤 따로 부대를 이끌고 목천 방면으로 진격하여 직산, 성환, 평택을 거쳐 수원에서 이인좌와 합세할 계획이었다. 안후기의 부대가 동면 지역으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서림산으로 피난하였고, 목천 현감은 원군을 청하러 간다며 현청을 비운 채 공주 감영으로 도망을 쳤다. 남아 있는 목천의 병력이라야 겨우 20명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6명의 목천 사족이 의병이 되어 반군과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윤이관(尹以寬)이 사촌 형 윤이오(尹以五)와 사촌 동생 윤이천(尹以天)을 설득하였고, 윤이관의 친척인 윤병(尹柄)은 아우 윤거(尹椐)와 윤두(尹枓)를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윤이관·윤이오·윤이천·윤병·윤거·윤두·이명달(李命達)·이기현(李箕賢)·김동래(金東來)·이진하(李振夏)·이약제(李若濟)·최창조(崔昌祚)·김태두(金泰斗)·이시봉(李蓍鳳)·이약유(李若裕)·이광하(李光夏) 등 16의사는 2인 1조로 밤을 이용하여 활동하기로 하고 우선 자기 마을과 인근 마을 장정들을 의병에 가담하도록 권유하는 한편, 이웃 병천면 등지의 사람들에게도 협조를 청하여 수백 명의 장정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하여 반계 마을 뒷산에 집결해 의병 부대를 편성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안후기의 반군이 움직인다는 보고를 받은 의병 부대는 반군이 교통의 요충지인 석교 평야에 이르렀을 때 일제히 공격하여 한나절 이상 접전을 벌인 끝에 안후기와 부장 수명을 사살하고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기열은 전사하였다. 후에 나라에서는 16의사를 양무원종공신에 봉하여 그 충의를 기리게 되었다.

[관련 유적]

천안시에서는 16의사의 후손과 뜻있는 이들이 모여 목천 16의사 기념 사업회를 결성하였으며, 1984년 4월에 동면 화계리에 ‘목천 16의사 충의비’를 건립하였다. 이 충의비는 동면사무소에서 충절로를 따라 서남쪽 병천 방향 1.2㎞ 거리의 우측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충의비의 형태는 방형의 비좌(碑座)를 2단으로 올리고 검은 대리석의 비신을 세웠다. 비좌와 같은 석질의 옥개형 이수(螭首)가 있다. 총 높이 220㎝로, 주변에 보호 시설을 둘렀다. 전면에 ‘목천 십육 의사 충의비(木川十六義士忠義碑)’라 적혀 있고, 뒷면에 이인좌의 난에 활약한 목천 사족 16인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황]

목천 16의사 기념 사업회에서는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으며, 2012년 4월에는 제12회 목천 16의사 의거 기념식을 열었다.

[의의와 평가]

목천 16의사의 의병 활동은 조선 후기 정국을 뒤흔든 이인좌의 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목천의 사족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에 대해 기념비를 설립함으로써 역사적 사건이 잊히지 않도록 하여 천안 시민들의 역사 인식을 제고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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