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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560
한자 天安-義擧
이칭/별칭 2·9 반공 의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성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6년 2월 8일연표보기 - 천안 2·9 의거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46년 2월 9일 - 천안 2·9 의거 종결
발생|시작 장소 천안 2·9 의거 - 충청남도 천안시
성격 사건

[정의]

1946년 충청남도 천안군에서 일어난 좌익 소탕 사건.

[개설]

천안 2·9 의거는 해방 이후 신탁 통치(信託統治) 찬반의 갈림길에서 혼란에 빠져 있던 당시 천안 지역에서 좌익 세력을 소탕한 사건이다. 1946년 2월 8일 흑성산에 원인 모를 산불이 발생하여 전 의용 소방대원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였고, 당시 제2 부장이었던 유필남을 중심으로 좌익 공산주의 주동자였던 김두환, 이종걸 등을 소탕하였다.

[역사적 배경]

8·15 해방 직전에 독립을 위한 항일 의거를 목적으로 천안의 향토 민족 독립운동 인사들이 13인 동지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정석우[해방 후 초대 천안 경찰서장]를 중심으로 시작된 항일 운동 인사들의 활동은 해방 후 반공 2·9 의거로 이어지게 된다. 13인은 오세갑, 박복희, 이창중, 최영환, 김성기, 윤문식, 최태익, 서기석, 박영규, 유필남, 심의규, 정석우, 송연흥이다. 1945년 8월 30일에 천안 의용 소방대가 결성되었으며. 초대 대장은 김광수로 항일 운동 세력 인사였다.

1946년 1월 신탁 통치 찬반으로 전국이 혼란할 당시 천안 지역 찬탁(贊託) 좌익계의 행동 대원은 300여 명이었고, 반탁(反託) 우익 측은 40~50명 정도였다. 1946년 1월 11일 약세의 우익 인사들은 ‘천안 광복 청년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광복 청년 회원들은 거의가 의용 소방대원으로 결성되었으며, 좌익의 가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면 대립 투쟁을 결의하였다.

[경과]

1946년 2월 8일 오후 3시경 충청남도 천안군[현재의 천안시] 목천읍 흑성산에서 원인 모를 산불이 발생하여 천안 의용 소방대원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흑성산 산불 진화 작업 이후 모든 대원은 큰 재빼기에 있는 서울 식당에 모여 심상치 않은 국내 정세와 천안의 긴급 상황에 대한 정보를 논의했다. 이때 수도 주물 공장이 좌익계 노동자들의 습격을 받고 있다는 긴급한 상황을 연락받고, 젊은 소방대원들이 좌익 세력을 소탕했다.

당시 천안 의용 소방대 제2 부장이었던 유필남은 천안 의용 소방대가 궐기해야 하는 상황을 설명했다. 일본, 만주 등 해외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 김두환이 이종걸 천안군당 인민 위원장·방한두 부위원장·이병국 조직책·임두빈 내무서 계장·오세환 청년 부장·서광숙 행동 대원·정갑용·김태익과 접선하고, 신탁 통치를 찬성하는 선동과 천안 지하 조직 공산주의자 공작원들과 합세해 조직을 강화하고 있으며, 공작원들이 우익 인사들을 테러·암살할 계획 아래 조직을 배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천안 지역의 신탁통치 반대 지도자들이 공산주의들에게 희생당하는 것을 막고,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을 막기 1946년 2월 8일 저녁에 결행하기로 의견을 일치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조직 공작 활동의 은신 장소인 흥아 산업, 수도 주물 공장, K.T.C[한국 트럭 회사]의 노동자들 속에 숨어 있었다. 천안 의용 소방대는 3개 편대로 행동 조직을 편성했고, 여기에 광복 청년단원들이 동조했다.

1946년 2월 8일 밤, 먼저 신탁통치 찬성 주모자이자 인민 위원회 노동책이며, 『자유 신문』 지국장이었던 최종순의 집을 급습해 체포하여 경찰에 인계하였다. 그리고 가택 수색 중 우익 인사 테러·살해 대상 명단을 입수하게 되었다. 테러·살해하려 했던 인사는 당시 천안 경찰서장이었던 정석우, 천안 군수였던 유광준, 천안 의용 소방대장이었던 김광수, 반탁 위원장 윤길순, 조흥은행 지점장 이병흠, 남창당 인쇄소 남응원 등 지방 유지 30여 명이었다.

2월 9일에 의용 소방대원들과 광복 청년단원들은 최종순의 집에서 입수한 증거 내용을 확인하고 행동에 들어갔다. 수도 주물 공장, 흥아 산업, K.T.C를 일제히 급습한 대원들은 공장 노동자들 속에 숨어 있는 공산당원들을 색출해 소탕했다. 이 사건으로 공산주의들은 모두 도주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 날 오후에 주동자 김두환이 전 문화원 옆 천왕사[당시 대흥사]에 처 김동일과 같이 은신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급습하였으나, 김두환은 K.T.C 급습 소식을 미리 알고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 광과 다락에 다량의 무기가 있었다.

2월 11일 천안 의용 소방대원들과 광복 청년단원들은 성환에 진출하여 성환 의용소방대 조귀실, 송범용, 장갑준, 이종석 등과 합세해 성환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 이종걸, 정선용, 정근용을 체포하여 천안 경찰서에 인계하였다.

[결과]

천안과 성환의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 인사를 테러·살해하려는 계획은 사전에 진압되었다. 2월 24일 『대동 신문』과 『전국 노동자 신문』, 『동아 일보』는 최초로 좌익 소탕 작전이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의의와 평가]

천안 2·9 의거는 천안 주변 지역에 알려졌고, 우익 인사들은 큰 힘을 얻었다. 아울러 이에 힘입어 천안 의용 소방대는 이웃한 아산, 평택, 안성까지 진출해 공산당원 소탕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천안 삼거리 공원의 천안 2·9 의거 기념탑에서는 현재도 매년 기념식이 개최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7.22 관련시청각 2건 연결 '광복 기념비'를 '2·9 의거 기념탑'으로 수정 후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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