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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535
한자 大韓光復團
이칭/별칭 광복회(光復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3년연표보기 - 대한 광복단 설립
최초 설립지 대한 광복단 - 경상북도 풍기
성격 독립 운동 단체
설립자 유창순|유장열|한훈|강병수|김병연|정만교|김상옥

[정의]

1913년 경상북도 풍기(豊基)에서 조직되어 천안 출신의 인물이 가담한 독립 운동 단체.

[설립 목적]

대한 광복단은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변천]

대한 광복단은 1910년대 국내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항일 비밀 결사 조직 중의 하나로 1913년 경상북도 풍기[현재 영주시]에서 채기중(蔡基中), 유창순, 유장렬(柳璋烈), 한훈(韓焄), 강병수(姜炳洙), 김병렬(金炳烈), 정만교(鄭萬敎), 김상옥(金相玉), 정운홍(鄭雲洪), 정진화(鄭鎭華), 황상규(黃相圭), 이각(李覺) 등이 조직한 독립 운동 단체이다. 이 중 천안 출신으로는 유창순(庾昌淳)유장열(劉璋烈), 한훈(韓焄), 강병수(姜炳洙), 김병연(金炳然), 정만교(鄭萬敎), 김상옥(金相玉)이 있다.

대한 광복단(大韓光復團)은 이후 대구의 우재룡(禹在龍), 박상진(朴尙鎭), 권영만(權寧萬), 양제안(梁濟安), 김경태(金敬泰), 김한종(金漢鍾), 엄정섭(嚴正燮) 등이 합류하여 광복회(光復會)로 개칭하였다. 다시 1916년에 노백린(盧伯麟), 김좌진(金佐鎭), 신현대(申鉉大), 윤홍중(尹洪重), 신두현(申斗鉉) 등이 가담하여 광복단이 되었다.

광복단 회원은 약 200명 정도이며, 국내에서 국외로 독립 운동의 터전을 넓힐 때 노백린 등 10여 명은 중국 상해로, 박성태, 김좌진 등은 만주로 건너갔다. 조직은 군대식으로 중앙에 총사령(總司令) 박상진, 부사령 이석대(李奭大)[후에 김좌진], 지휘장 권영만을 두었고, 그 아래에 재무부, 선전부를 설치하였으며, 각 도(道)에는 지부장을 두었다. 이석대가 남만주 회인성(懷仁城)에 주재하면서 활동을 담당하였으며, 그 후 우재룡이 길림(吉林)에서 주진수(朱鎭洙), 양재훈(梁載勳), 손일민(孫一民), 이홍주(李洪珠) 등과 협의하여 광복회 만주 지부를 결성하였다. 광복단은 만주에서 군대를 편성하여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광복단은 비밀 조직이었던 관계로 정체가 좀처럼 노출되지 않았으나 회원인 이종국(李鍾國)이 1918년 1월에 천안 경찰서에 밀고함으로써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한 37명이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한 한훈 등의 회원은 만주로 가서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광복단은 단원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장하고, “오등(吾等)은 대한 독립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죽음으로써 결의하고 구적(仇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기로 천지신명께 서(誓)함”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는 한편, 국내외에서 무장 활동을 전개하였다.

투쟁 방법으로는 부호의 의연금과 일본인의 불법 징수 세금을 압수하여 전 단원이 무장하고, 사관 학교를 설치하여 무관의 양성 및 연락 기관을 설치하여 군사상 집회 및 왕래 장소로 사용하며, 일본인 고등관 및 변절자의 처벌과 무력전 개시 등을 하였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삼남 지방의 부호를 대상으로 부호들에게 군자금 모집 취지서를 발송하고 친일파 처단 활동을 했다. 영남 지방에서는 박상진채기중이, 기호 지방은 김한종장두환이, 관동 지방은 김동호(金東鎬)가 담당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광복단의 활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道高面長)인 친일파 박용하(朴容夏)와 경상도 관찰사이자 악질 친일 부호인 장승원(張承遠)의 암살 사건이었다.

[현황]

광복 후 천안 출신의 유창순 의사를 비롯한 7명의 공적을 기려 천안 삼거리 공원광복회 기념비를 세웠다. 7명의 이름은 유창순(庾昌淳), 장두환(張斗煥), 성달영(成達永), 김정호(金鼎鎬), 조종철(趙鍾哲), 류중협(柳重協), 강석주(姜奭周)이다.

[의의와 평가]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와 염원을 꺾지 않았다. 그러한 의지와 염원이 구체적으로 표출된 것이 대한 광복단이었다. 또한 광복단은 이전까지 대립 양상을 보였던 의병 계열과 계몽 운동 계열 간의 결합이라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리고 1910년대 민족주의를 발전시킨 점과 그들의 의열 투쟁이 암살단, 주비단, 의열단으로 이어져 독립 운동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등에서도 역사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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