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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세금 거부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528
한자 天安稅金距否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0년 3월 12일연표보기 - 천안 세금 거부 운동 발생
성격 항일 시위

[정의]

1910년에 천안 지역에서 일어난 충청남도 최초의 항일 시위.

[개설]

통감부(統監府)는 한반도의 점령 경비를 충당하려고 각종 세제를 마련하여 수탈하였다. 이에 전국에서 세금 거부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천안에서 최초로 1910년 3월 12일 1,000여 명이 반대 시위를 전개하고 일본인 수세관에 불을 지르고 세금 장부를 불태웠다.

[역사적 배경]

대한 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세금 종류는 단순하여 토지의 조세와 호포(戶布)가 전부였다. 염세(鹽稅), 금은세(金銀稅) 등이 있었으나,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대부분의 농민들은 토지 관계 제세와 호포 정도만 내었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 체결 이후 일제는 헌병과 경찰 및 군대를 전국 13도에 배치했고, 군대 주둔비 등 한반도에서의 경비를 충당하려고 각종 세제를 마련하여 수탈하였다. 이에 통감부는 1909년 가옥세(家屋稅)·주세(酒稅)·연초세(煙草稅)·경작세(耕作稅) 등을 신설하였다.

당시 가옥은 대부분이 비와 이슬을 막는 초막에 불과하였는데, 과세를 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또한 상품화나 전매 제도가 확립되지도 못했던 실정에서 주세와 연초세는 사리에 맞지 않은 세금이었다. 더욱이 세금이 우리나라 사람을 위하여 사용된다고 하여도 걷기 어려운 형편인데, 일제가 자신들의 침략 경비로 충당하고자 하였으니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전국 곳곳에서 세금 거부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효시가 천안에서 발생하였다.

[경과]

1910년 한 해에 통감부는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통하여 가옥세 21만 6000원 등 총 80만 원이나 수탈하였고, 이 가운데 60만 원이 그들의 인건비와 군대 주둔비 등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가옥세·주세·연초세에 대해 한국인들이 반발을 당연한 일이었다.

천안에서는 천안군민회에서 가옥세 및 주세, 연초세를 반대하기 위하여 1910년 3월 6일에 60여명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재무서에 압박을 하고자 했다. 이를 일본 헌병과 경찰 간부가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점점 사람들이 모여 천 여 명이 되었다. 이들은 재무서로 가려 하였으나 경찰 관리가 해산시키고 경계를 하는 중이라고 1910년 3월 9일자 신문과 1910년 3월 12일자 신문에 보도가 되었다.

천안 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주세와 연초 경작세를 부과하였고, 천안에 나와 있던 일본인 수세관과 그 밑에서 앞잡이 노릇을 하는 한국인의 횡포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세금의 징수가 제대로 되지 않자 수세관은 1910년 3월 12일 장날을 이용하여 가마니 공출날을 잡고 장터에서 세금을 차압하려고 했다. 이는 곧 농민들이 겨울 동안 짠 가마니를 장날에 수매하고 가옥세 체납자에게는 가마니 값에서 공제하려 했던 것이다. 더욱이 가마니 값은 헐값이었기 때문에 밀린 세금을 떼고 나면 농민들이 가져갈 돈이 몇 푼밖에 되지 않았다.

이때 농민 한 사람이 수세관에게 사정을 호소하다가 오히려 수세관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한국인에게 뺨만 얻어맞았다. 그러자 가마니 수매장에 모였던 1,000여 명의 장꾼들이 흥분하여 수세관 사무실로 몰려갔다. 장꾼들은 마침내 사무실에 불을 지르고 장부를 찢어 버렸고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반일 시위로 돌변하였고, 마침내 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주모자를 체포하였다. 이렇게 천안의 농민들은 격렬한 반대 시위를 벌여 일제의 수탈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결과]

이 시위로 체포된 사람은 20여 명이 넘었는데, 대부분 풀려나고 주모자 3명만이 공주 감옥으로 압송되었다가 몇 개월도 되지 않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관찰사에게 민심을 수습하라는 지시와 경고장이 이완용(李完用) 총리대신으로부터 내려졌다. 그렇지만 관찰사에게는 수습할 계책이 없었다. 다만 천안군수에게 다시는 그와 같은 소요가 발생되지 않도록 하라는 훈시를 내리고, 불타 버린 수세관 사무실을 복구해 주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의의와 평가]

천안 세금 거부 운동은 구금자를 ‘한일 합방 은사(恩赦)’라는 이름으로 석방하여 무마하려 하였지만 그 여파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개인적으로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이가 많았다.

천안군민들의 세금 거부 운동은 충청남도 역사상 최초의 항일 시위였으며, 일본의 통감부에 대한 한국인의 울분을 폭발시킨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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