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505
한자 陶器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정의]

조선 시대 천안 지역에 위치했던 도기 굽는 곳.

[개설]

관수용품이나 민간에서 쓰이는 도기와 자기를 굽는 가마 시설은 고려 시대부터 전국 곳곳에 위치하였다. 조선 건국 후 국가는 공물로서 도자기의 제작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전국의 도기소(陶器所)와 자기소(磁器所)의 정보를 수집하였는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이 바로 그러한 제도의 산물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천안군, 목천현, 직산현의 도기소와 자기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변천]

1454년(단종 2)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천안군의 도기소는 남쪽 풍세현(豐歲縣)의 기화곡동(其火谷洞)에 있었다. 품질은 주로 민간 소비용인 하품(下品)이었다. 자기소 역시 남쪽 풍세현의 개재골[介峴洞]에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품질은 하품이었다. 목천현의 도기소는 북쪽의 널으니[板陰]와 동쪽의 개목[犬項]에 있었다. 모두 하품을 생산했다. 자기소는 북쪽 오산(烏山)에 있었으며, 중품을 생산하였다. 직산현의 도기소는 동쪽 천흥리(天興里)에 위치했는데, 품질은 하품이었다.

1530년(중종 25)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이와 같은 도기소 기록은 없지만, 각 지역의 토산 조를 보면 도기 생산 여부를 짐작할 수 있다. 천안은 천안 사기그릇[磁器]과 오지그릇[陶器]이 토산에 포함되며, 목천은 목천 사기그릇이 토산품이었다. 즉 도기소에서 생산되던 자기와 도기가 각 지역의 토산품으로 등재되어 관에 납품되었을 것이다. 지리지에 도기소가 따로 명시되지 않은 것은 도기 제작의 변화와 관련된다. 15세기 중엽 이후 도기소와 자기소는 감소하여 관요 체제로 넘어갔으며, 주요 생산품 역시 백자 위주로 바뀌어 갔다.

[양곡리 분청 사기 요지]

한편, 천안 일대 도요지는 1996년에 백제 개발 문화 연구원의 지원으로 조사되었다. 이때 천안시 양곡리 일대에 분청사기 요지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양곡리 일대는 조선 시대에 목천현에 속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 등으로 미루어, 양곡리 일대가 1500년대 주요 자기 생산지였을 것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