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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411
한자 龍井里-笠場面-
이칭/별칭 용머리,불그머리,붉은 우물,강당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종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천안군 입장면 용정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63년 1월 1일 - 천안군 입장면 용정리에서 천원군 입장면 용정리로 개칭
변천 시기/일시 1991년 1월 1일 - 천원군 입장면 용정리에서 천안군 입장면 용정리로 개칭
변천 시기/일시 1995년 5월 10일 - 천안군 입장면 용정리에서 천안시 입장면 용정리로 개칭
변천 시기/일시 2008년 6월 23일 - 천안시 입장면 용정리에서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용정리로 개칭
공장 현대 엘리베이터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용정리 235-2 지도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2.05㎢
가구수 108가구
인구[남,여] 269명[남자 137명, 여자 132명]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입장면사무소 서북쪽 약 3.5㎞ 지점에 위치하고, 직산읍 진산(鎭山) 성산(城山)[사산성(蛇山城)]의 용안치(龍鞍峙) 능선 동쪽 끝 용머리[龍頭]에 해당된다. 경부 고속 도로국도 34호선이 통과하고, 한천(漢川)[한내[大川]], 입장천(笠場川)에 합류하여 흐른다.

[명칭 유래]

조선 시대에 직산현(稷山縣) 삼동면(三東面) 용두리(龍頭里), 적정리(赤井里), 강당리(講堂里)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용두리의 ‘용’ 자와 적정리의 ‘정’ 자를 따서 용정리(龍井里)라고 이름을 붙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 직산현 삼동면 용두리, 적정리, 강당리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을 통폐합할 때 충청남도 천안군 입장면 용정리가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이 통합하여 천안시로 승격됨에 따라 천원군 입장면 용정리가 되었고, 1991년 1월 1일 천원군천안군으로 명칭을 변경함에 따라 다시 천안군 입장면 용정리가 되었다. 1995년 5월 10일 천안시와 천안군의 통합에 의하여 천안시 입장면 용정리가 되었으며, 2008년 6월 23일 행정구 설치에 따라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용정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한천이 남북으로 길게 흐르며, 일제 강점기 때 직산 금광에서 사금을 많이 채취했다.

[현황]

2011년 12월 31일 현재 면적은 2.05㎢이며, 총 108가구에 269명[남자 137명, 여자 13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용정 1·2리의 두 개 행정리가 있다.

동쪽은 입장면 신두리, 남동쪽은 성거읍 삼곡리, 남서쪽은 직산읍 판정리, 북서쪽은 입장면 흑암리, 북동쪽은 입장면 가산리와 경계를 접한다.

경부 고속 도로가 남북으로, 국도 34호선이 동서로 관통하면서 용정리 중심부에서 교차한다.

불그머리적정(赤井), 불그물, 불은 우물이라고 하며, 용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불그머리에 큰 우물이 있는데 물맛이 좋아 백제 때 나라에서 쓰기 위해 우물 둘레를 구리로 둘러 만들었다고 한다. 또 우물 근처의 흙이 붉은 색이므로 붉은 우물이 되었다고도 하고, 서양 사람들이 금광을 할 때 이곳에 살면서 붉은 벽돌로 샘 주변을 쌓아 적정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용두는 용머리인데 성산 용안치(龍鞍峙) 능선 동쪽, ‘용의 머리’에 해당된다. 양관(洋館) 터는 서양 사람들이 직산 사금광을 운영할 때 일본인보다 먼저 들어와 머물던 곳이라 한다. 목비산은 중국 사람이 조선에 큰 장수가 태어날 것이라며 산의 목을 잘라 혈을 끊어 장수가 못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혈을 끊을 때에 피가 나왔다고 하고, 산의 목을 잘랐다고 하여 목 베인 산이라고 한다.

특산물로 거봉 포도와 신고 배가 있고 벼농사가 주를 이룬다. 사통팔달 편리한 도로 교통망으로 인해 대형 물류 창고가 많이 지어졌으며, 현대 엘리베이터 공장 등이 입주해 있다.

서쪽 옥녀봉(玉女峯)[태봉산(胎封山)]에 임금의 태를 묻었다고 하는데, 군사 시설인 제3 탄약창의 철책에 가로 막혀 있다. 불그머리 남쪽 마을 입구에 조선 선조 때 효자 전주 최씨 최돈(崔墩)과 아우 최기(崔基), 아들 최극인(崔克認)·최극성(崔克成)·최극해(崔克諧)·최극량(崔克良), 최극해의 아들 최주민(崔柱旻), 최주민의 아들 최황(崔惶)·최찬(崔燦) 형제 등이 4대에 걸친 효자로 벼슬을 받은 사람이 모두 여덟 명이 되어 정문이 내려졌다. 삼남 대로를 지나는 사람마다 크게 감탄하고 정문이 있는 거리를 정문 거리라 불렀고, 이 이름이 지금까지 내려온다.

불그머리에서 정제를 지내는데, 세 개의 우물에서 지냈으나 한 개가 없어져 정샘, 보샘 두 개의 우물에서만 지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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